엘리 위젤의 자서전-(빛이 들지 않는 밤) ㅡ흑야



-엘리위젤과 흑야-.


헝가리'의 작은 마을 '시게트'라는 곳에서 
신앙심 깊은 부모의 사랑을 받는 외아들로 (두 누나와 동생이 있었다-,)태어나-
유년시절을 15살까지 보냈고 하느님의 선민의식을 지니고
유대교의 하느님을 믿으며 자란 소년이었던 엘리위젤-. 

엘리위젤의 자서전 격인 흑야-.
원제:night"빛이 들지 않는 밤" 이라는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소년에게서 사라진 하느님께 보이는 신앙의 상실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프랑소아 모리악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
아내를 통해서 들은 아우슈비츠로 가기위해 열차를 기다리며 서 있던 유대 소년들의 모습이었다.

프랑소아 모리악 과의 인터뷰를 청한 어느 호감가는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기자가 바로 그 열차를 기다리던 유대 소년들 중의 한 명이었음을 듣게되고,
그  소년에게서 이미  죽어버린 하느님도, 아직 프랑소아 모리악에게는
각자 속에서 하느님만이 아시는 방식으로 살아계시다는 믿음을  말하며 

그래도 모든 것은 은총이다고  느끼지만
(그는 끝까지 은총을 말한 가톨릭적 실존주의 작가였다)
겉으로는 그를 부둥켜 안고 울 수 있을 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나이트'는 엘리 위젤이 처음엔 유태인 말인 이디쉬어로 썼고,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돼 세계에서 널리 읽힌 책이다-.
2006년 엘리 위젤의 부인 마리엔이 다시 영역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까지 올랐다-.

위젤은 1986년 인종차별과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벨평화상 연설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가담해야 합니다. 중립은 가해자만 도울 뿐 희생자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침묵은 결과적으로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입니다.
 때로는 간섭해야 합니다. 인간의 목숨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 받을 때는
 국경을 초월해 나서야 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소설 흑야가 말하는 포인트-


첫째,
그들을 몰고가는 운명이  피할 수 있는 몇번의 기회를 주었던 경고의 음성에
왜 유대인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토록  소극적 인종만으로
견디었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그 태도가 올바른 신앙의 자세였을까 하는 것이다.
설마하는 미래에 대한 순진한 낙관이 인간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을 주는 판단으로
그들의 확고한 전통 속에서

기도와 무저항의 자세로  머무르려한 것이게으름과 안일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
런 전망과 부족한 통찰로
인류의 구원에 이바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둘째
가공할 악 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들이닥쳐 겪게된 공포가 아무런 악의 현실에 대한 준비없이
순진한 신앙을 지닌 이들에게 갑자기 덮쳐올 때 그런 순진한 믿음이 공포와 악 앞에서
여전히 그들의 신앙을 지켜줄 힘이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흑야에서-

훌륭한 랍비였던 이들이 무너져가고
오직 밀교를 공부하던 눈에 띄지 않던 어눌한 모세만이 그 현실 앞에서 변하여
그 악을 피하도록 촉구하고 달아나는 통찰력 있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미치광이 취급만을 받을 뿐 아무도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유대인들이 그토록 확고히 지키고  유지하려했던
그들의 믿음 생활은 파괴되고 하느님마저 잃게되고 만다.
급기야는 자신의 아버지마저 짐으로 여겨 오직 자신이 살기 위해 버리게되고,
이윽고 자유를 찾았을 때에는 분노와 복수심도 없이 오직 먹을 것에만 매달린다

먹을 것이 충족된 이후에도 한동안은 부모나, 가족, 친지에 대한 생각은 떠오르지 않고
옷이나 성욕을 채우는 일로 나아간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정진석 주교에게 이 책을 소개하며 혹시 교회의 금서목록이 되지 않을까
우려까지 하던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유대소년이 신앙을 버릴 수밖에 없던
그 황폐한 마음자리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이렇게 말한다-.

" 이 하느님 부재의 자리를 이미 십자가상의 예수께서는 체험하셨다.
하느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외침이 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고 하셨다.

 "기다림이 끝나는 날에도  기다리는 님은 오지 않았기에
   나는 님을 누군지 알 것만 같다."   -  김형영-


오늘의 나는 프랑소아 모리악이 믿는 은총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잿빛의 엘리 위젤과 더 친근하며 하느님관이 철저히 달라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세가 말한 것처럼
올바른 물음을 할 수 있을 때라야, 그 달라짐은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이다.



인간성에 대한 물음이 달라지는 이런 체험들은  신앙에 대한 물음이나
하느님에 대한 물음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전망도 달라지게 한다.

발터 벤야민이 하시디즘과 밀교에 빠져들던
생의 전반기를 보낸 후 나중에 사회주의자로 변해간 것도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 없는 신비주의적 기도의 자세만으로는
인간의 구원을 말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메시아의 구원으로도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는 시간대"를
게오르규는 25시라고 말했는데
세상의 어두움과 혼란이 그러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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